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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천와(聽天窩)

영천이씨 청천와파(永川李氏 聽天窩派)

25.0x65.0x2.6 / 해서(楷書)MOR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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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자료명 청천와(聽天窩)
  • 글자체 해서(楷書)
  • 크기 25.0x65.0x2.6
  • 건물명 청천와(聽天窩)
  • 공간명 영천이씨 청천와파(永川李氏 聽天窩派)
  • 서예가
  • 위치정보 안동시 녹전면 원천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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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천와(聽天窩)

청천와(聽天窩)


청천와(聽天窩)는 간재(艮齋) 이덕홍(李德弘, 1541~1596)의 손자인 청천와(聽天窩) 이영전(李榮全)이 경상북도 안동시 녹전면 원천리에 건립한 정자의 편액이다. ‘청천’은 하늘의 소리를 듣는다는 뜻으로, 하늘로부터 부여받은 본성을 따른다는 뜻이다. 목재(木齋) 홍여하(洪汝河, 1620~1674)의 「청천와기聽天窩記」에 따르면 “하늘에서 부여받은 본성이 있음을 알아서 인위적으로 하는 것이 없는데도 저절로 그렇게 됨을 체득하여 얻고 잃음도 오직 하늘에 달려 있다.” 또 “영화로움과 욕됨도 오직 하늘에 달려 있다.”라고 말하여 처한 상황을 편안하게 여겨야 한다고 하였다. 또한 본성이란 하늘에서 나오며 마음이란 본성이 깃드는 곳이다. 마음을 보존하지 못하면 본성을 기를 수 없고, 본성을 기르지 못하면 하늘의 소리를 들을 수 없다. 마음을 보존하면 하늘을 알 수 있으니, 하늘을 알면 순응하고, 순응할 줄 알면 즐거워지며, 하늘의 소리를 들어서 즐거움에 이른다면, 거의 도에 가까울 것이라고 하였다. 그리고 이것은 도연명의 「귀거래사歸去來辭」 끝 구절에 “천명을 즐길 뿐 다시 무엇을 의심하겠는가.[樂夫天命復奚疑]”라고 한 의미와 장재(張載)가 “살아서는 내 하늘에 순응하고, 죽어서는 내 편안하리라.[存吾順事 沒吾寧也]”라고 한 의미와 일맥상통한다.

작은 글씨이지만 튼튼하고 굳센 필세다. 모가 난 강한 방필의 기필을 구사하고 마무리에 뾰족한 붓끝이 언뜻언뜻 드러내 보여 경쾌함이 있다. 크지 않는 편액이라 실제 걸려 있다면 편액은 아담하고 그 안의 글자는 박힌 듯 또렷할 것이다.

(서예가 恒白 박덕준)

영천이씨 청천와파(永川李氏 聽天窩派) 소개


영천이씨(永川李氏) 간재(艮齋)종택은 고려 초기 영천 출신 평장사 이문한(李文漢)의 후손이다. 고려 말 군기시소윤을 역임한 영천 출신의 낙은(洛隱) 이헌(李軒)이 1350년(충정왕 2) 경에 예안의 부내[汾川]를 지나가다 수려한 산수에 반해 이거하였다. 입향조 이헌은 형제를 두었는데, 맏이 이파(李坡)는 문과에 급제하여 의흥현감을 지냈다. 그의 외손녀가 노송정 이계양의 배위이니, 곧 퇴계 이황의 조모이다. 따라서 농암 이현보와 퇴계 이황은 7촌의 인척이 된다. 둘째 이오(李塢) 역시 문과에 급제하여 예문관직제학으로 판서 황유정(黃有定)의 손녀사위가 되었고, 관찰사 금숙(琴淑)과 사돈관계였다. 이파의 아들로는 이효손(李孝孫)과 이성손(李誠孫)이 있다. 이효손은 봉례를 역임하였으며, 이효손의 첫째 이흠(李欽)은 인제현감을, 둘째 이균(李鈞)은 직장을 지냈다. 이흠의 장남이 바로 청백리에 관리로 뽑혔고 강호가도(江湖歌道)의 창도자로 일컬어지는 농암(聾巖) 이현보(李賢輔, 1467~1555)이다. 이흠의 차남인 광헌(廣軒) 이현우(李賢佑)가 분천(汾川) 상류에 있는 천사(川沙 일명 내살미)로 이거하였고, 이현우의 아들 이충량(李忠樑)이 나주박씨(羅州朴氏) 박승장(朴承張)의 딸을 아내로 맞이하면서 영주로 옮겨 살게 되었다. 이후 이충량의 넷째 아들인 간재 이덕홍이 만년에 안동시 녹전면 원천리 오계에 정사를 짓고 은거함으로써 오계에 집성촌이 형성되었다.

간재 이덕홍은 10여 세에 퇴계 이황의 문하에 들어가 학문에 열중하여 자식처럼 사랑을 받았다. 모든 학문에 뛰어났는데, 특히 역학에 밝았다. 1578년(선조 11) 한강(寒岡) 정구(鄭逑)를 위시해서 9명의 명사가 조정에 천거되었는데, 이덕홍은 그중에 네 번째로 뽑혀 집경전참봉에 임명되었다. 종묘서직장과 세자익위사부솔을 지냈으며 임진왜란 때에는 세자를 호종하기도 하였다. 1593년(선조 26) 영춘현감으로 나아가 굶주린 백성들을 구제하는 데 온 힘을 기울였다. 이덕홍의 장남은 선오당(善迃堂) 이시(李蒔, 1569~1636)로, 그는 청천와 이영전의 부친이다. 그는 한강(寒岡) 정구(鄭逑)의 문하에 나아가 수학하면서 학문의 외연을 넓혔다. 일찍이 향시에 합격하였지만, 어지러운 과장의 모습을 보고 실망하여 벼슬을 단념하고 학업에 전념하였다. 만년에 부친이 경영하던 오계정사가 훼손되자 이를 쌍계마을로 옮겨 오계서당이라 이름 짓고 후진양성에 힘써 많은 학자들을 길러 내었다. 인조반정으로 아우들이 화를 당하자 두문불출하다가 1636년(인조 14) 세상을 떠났다.

청천와의 주인인 이영전은 자가 원길(元吉), 호는 청천와(聽天窩), 부친은 이시, 모친은 진성이씨(眞城李氏)로 진사 종도(宗道)의 딸이다. 그는 평생을 고향에서 은둔하면서 부친의 뜻을 받들어 벼슬의 길로 나아가지 않은 채 오로지 성리학 연구에만 몰두하였다. 퇴계 이황과 간재 이덕홍으로 내려오는 영남학파의 학풍을 계승하였으며, 청천와를 짓고 강학에 힘써 목재 홍여하를 비롯한 수많은 제자들을 양성하였다. 궁핍한 생활 속에서도 항상 여유를 가지며 자연의 아름다움을 즐기고, 후학 양성과 지방의 미풍양속을 위해 그의 모든 정열을 다 받쳤다.

청천와가 있는 안동시 녹전면 원천리는 조선시대 말 예안군 북면에 속했던 지역으로, 1914년 행정구역 개편으로 원당리·어리·길명리, 영주군 천상면 오천동, 봉화군 임지면 구천리의 일부가 통합되어 원천동으로 개편되고 안동군 녹전면에 편입되었다. 1995년 안동군이 안동시와 통합되면서 안동시 녹전면 원천리가 되었다. 마을 뒤에는 복두산이 솟아 있어 골짜기가 많고 앞으로는 상운천과 용각천이 흐르는 전형적인 배산임수형의 농촌 마을이다. 청천와는 정면 2칸, 측면 1칸 반의 건물로 홑처마 팔작지붕이다. 좌측에 마루방을 두고 우측에 1칸의 온돌방을 배치하였다. 전면에는 퇴를 내어 마루로 꾸미고 난간을 달았다. 마루방은 우측의 온돌방을 제외한 삼면에 벽체를 만들고 분합문을 달았다. 시멘트로 마감한 기단 위에 덤벙주초를 놓고 기둥을 세웠다.

참고문헌
  • 홍여하, 「청천와기」, 『목재집』, 한국문집총간 124집, 민족문화추진회, 1994.
  • 남재주, 「오계서원」 『안동의 서원』, 안동청년유도회, 2016.
  • 『안동의 현판(상)』, 안동민속박물관, 2004.
  • 「이영전」,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